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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ViLLAiN(빌런)

이제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은 없다.

    타케미치가 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피로감 속에서 느끼는 건 그것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면적만큼 푹 들어간 침대 속에서 얇은 이불로 배를 덮고 무늬 없는 아이보리 색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나에게 시간을 오고 갈 수 있는 능력을 준 건 분명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건 분명 숙명이라고 불러야 할 거대하고 중대한 임무였다. 시작은 단 한 명이었고, 개인적인 정의감이었고,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다는 이기주의에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어느덧 나 혼자만이 쓸 수 있는 이 힘은 너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게 아닌, 네 주변의 가련한 영혼들을 구하라는 하늘의 계시 같은, 높고 고결한 이상 따위로 느껴졌던 것이다. 자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덧 제 주변을 둘러싸던 어리숙하고, 폭력적이고, 미숙하고, 또한 안쓰러웠던 영혼들의 가여운 편린을 알게 되면서 그들을 진정으로 구해주고 아끼며 자신의 인생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 타케미치였다. 그들의 영혼과 인생을 모두 어두운 구렁텅이에서 꺼냈다고 생각했을 때, 타케미치의 몸을 짓누른 건 사명이 달성되었다는 해방감과 그동안 쉬지 않고 제 몸을 희생해왔던 대가였다. 이제 책임을 내려놓고,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일만이 남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타케미치는 몸을 일으켜 검고 짧은 털이 묻은 이불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린다. 이 털은 밝고 곱슬거리는 금발인 타케미치 자신의 것도 아니고,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금발의 그의 것도 아니었다. 침대 아래 바닥에서 자고 있는, 검은 고양이의 털이었다. 타케미치가 몸을 앞으로 숙여 침대 아래의 검은 고양이, 페케제를 바라본다. 어두운 방안이므로 검은 털을 가진 페케제는 더욱 보이지 않았지만 숨소리로 잘 자고 있다는 사실을 안 타케미치는 다시 몸을 당겨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구했고 또 그만큼 다쳐왔던 상처투성이의 손. 손바닥 가운데에는 커다랗게 칼에 찔린 흉터가 남아있고, 손가락과 손가락 마디에는 자잘한 상처와 반창고가 붙여져있다. 그러고 보니, 이 손이 가장 고생이 많았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투박한 양손이 지금까지 해온 일의 증명, 또는 훈장처럼 생각되었다.

    타케미치는 고개를 돌려 옆에 누워 자고 있는 그를 바라본다. 찰랑이는 금발을 투블럭으로 밀고 회색 후드티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 반바지를 입고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자고 있었다. 타케미치는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어차피 들리지 않을 테니 조금은 당당하게, 사랑스럽게.

    "치후유."

    타케미치는 풀썩 드러누워 몸을 돌리고 치후유의 등을 조심스레 껴안는다. 그와 등을 맞대고 낯선 얼굴 들고 주먹다짐을 하던 나날들이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선명하게 덧칠되곤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과거와 미래 그 사이를 잇는 다리에서조차도, 어떤 장소에서도 그는 타케미치와 함께 있어주었다. 어깨를 껴안아주고 파트너라고 불러주었다. 자신이 악마의 꾀임에 넘어갔을 때조차도 그를 믿고 곁에 있어주었다. 한 마디로는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애틋한 감정들. 그 말을 대신해 그는 마지막으로 대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면으로 드러내듯 치후유를 안았다. 스스로도 이 감정의 총합이 우정이라는 범주를 넘었다는 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타케미치를 짓누르던 사명감에서 해방된 지금 스스로의 감정에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한 상태였기에 어떤 짓을 해도 후회는 남지 않았다. 자신이 바라던, 모두를 구한다는 목표를 이뤄왔던 과정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운명 같았지만 결국엔 사랑하는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사적인 감정으로 똘똘 뭉쳐버렸고, 그렇기에야말로 눌러왔던 은밀한 감정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내일이면 타케미치는 돌아간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이곳에 남겨둘 치후유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이 시간 선의 타케미치도, 지금의 타케미치도 치후유는 똑같이 대해줄까. 그렇지 않았으면 했다. 함께 싸워왔던 자신을 특별하게 여겨주었으면 했다. 

    타케미치는 치후유의 등에서 떨어져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파랗고 작은 꽃잎이 달린, 얇은 갈색 줄기가 납작하게 눌려 종이와 필름 사이에 끼워져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잘려있다. 윗부분에는 작게 구멍을 내어 푸른색 리본을 꿰어 둔, 손바닥에 들어오는 크기의 책갈피였다. 타케미치는 치후유의 허리에 손을 둘렀고, 치후유의 후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순간이었다. 치후유의 커다란 손이, 덥석 타케미치의 손 위로 겹쳐졌다. 타케미치는 이 이상 없을 정도로 화들짝 놀라 숨을 삼켰고, 치후유는 작게 웃었다.

    "이게 뭐야? 파트너. 종이?"

    치후유는 방금 일어난 사람답지 않게 맑은 목소리로 타케미치의 손과 책갈피 사이로 제 손을 집어넣어 타케미치의 손을 바깥으로 끄집어 내고 반대쪽 손으로 책갈피를 집어 들었다. 타케미치는 그제서야 치후유가 곤히 잠든 척을 했고, 사실은 타케미치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등을 껴안을 때도 의식은 살아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에 피가 몰려 발개졌다. 치후유는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가 포기하곤 커튼을 열어젖혀 달빛에 그것을 비추어봤다. 바삭하게 마른 꽃잎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꽃맥과 드문드문 초록빛이 칠해진 갈색 줄기가 은은하게 쏟아지는 달빛을 받아 부드럽게 빛난다. 치후유는 마치 책갈피 속에서 푸르름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마치 타케미치의 눈동자처럼. 이쪽을 긴장한 눈길로 바라보는, 커다랗고 광활한 눈동자 너머. 살짝 발갛게 물든 뺨은 또 어떤가. 치후유는 그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치, 치후유?"

   "솔직하지 못하네, 타케밋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하라고. 난... 꽃말 같은 거 잘 모르니까."

   "...치후유, 나에게는 한순간일지도 모르지만, 너는 12년 동안 나를 기억해 줄 수 있어?"

   "... 그래."

   "나를... 기억해 줄 수 있어? 너와 등을 함께 맞대고 최악의 결말과 싸워왔던 나를..."

   "한 시도 잊지 않을게, 파트너."

   치후유는 울음과 함께 뱉어지는 타케미치의 새된 속삭임에 강하게 힘을 주고 타케미치의 몸뚱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타케미치에게 확신을 주리라 다짐하며 대답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 아주 강렬하고 짙은 진심을 실어 대답했다. 타케미치가 흘린 눈물이 자신의 어깨를 적시고, 치후유의 팔이 그의 몸을 부서질세라 껴안았지만 서로 거부감은 없었다. 오히려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했다는 아쉬움과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고 싶은 편안함이 그들을 감쌌다.

    타케미치는 치후유의 손에 들린, 마른 물망초가 든 책갈피를 그의 손과 함께 감싸며 활짝 웃는다. 꽉 찬 보름달 아래에서 만개하는 한 송이 풍성한 꽃처럼, 기도를 올리듯 웃는다.

   "너를 정말 좋아해. 부디, 나를 잊지 말아 줘."

   치후유는 물망초 꽃 앞에서 결의한다. 타케미치가 선명하게 속삭인 한마디를, 십 년이고 백 년이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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