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만한 남자 ]
글쓴이 : 스아이스
"산즈군!"
그 녀석은 줄곧 나를 그렇게 불러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몰라도 뻔뻔하게 이름을 불러대는 저 매끈한 입술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산즈군은 취미가 뭔가요?"
인사를 건네고 뒤이어 한 말이었다. 반사회 조직에 몸 담그는 사람이 지닐 취미라면 굳이 묻지 않아도 눈에 훤하지 않나? 도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저 투명하면서도 깊은 푸른 눈이 반짝 빛났다.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부실 정도로 순수한 그 녀석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일방적인 거부 의사에 기분 나쁠 법도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순수했던 탓인지, 그 녀석은 끈질기게 옆에 붙어와 내게 말을 걸었다. 시간을 남을 땐 뭐 하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뭐고 못 먹는 음식은 무엇인지. 며칠 동안 철야를 하면 힘들지는 않는지.
내 조용한 일상 속에 멋대로 들어온 그 녀석의 이름은 하나가키 타케미치.
"조용히 해 시궁창."
나는 그 녀석을 시궁창이라고 불렀다.
-
그 녀석과 만난 이유는 저 빌어먹을 시궁창의 성격 때문이다. 뜬금없이 범천의 아지트를 알아내서 죽치고 앉아있지 않나. 찾아가니 마이키를 찾으러 왔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않나.
내가 싫어하는 부류가 딱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시끄러운 것, 또 하나는 오지랖이 넓은 것. 안타깝게도 그 두 가지 모두 가지고 있던 그 녀석에게는 시궁창이라는 별명이 그 누구보다 잘 어울렸다.
일반인 주제에 그 범천의 수령, 마이키를 보러 왔다고 기세등등하게 찾아온 것도 기가 찼지만 그런 시궁창을 받아들인 마이키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먼저 가있으라는 말에 당연히 처리할 줄 알았지만 뜬금없이 기절한 시궁창을 업고 차를 대기시키라 명령한 그였다.
그리고 그런 시궁창의 뒤처리를 맡게 된 불행한 사람이 바로 이 몸이라는 말씀이다. 시궁창을 데리고 온 바로 다음날, 갑작스러운 호출에 부랴부랴 뛰어갔더니 시궁창을 부탁한다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허리를 뻣뻣이 세운 그 자세 그래도 몸이 굳었다.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얄팍한 기대심을 품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삼백안이 보이는 저 날카로운 눈빛이나 등 뒤로 뿜어져오는 카리스마는 그가 말한 모든 말이 진심이라고 알려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내게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름아닌 수령이고 나는 그런 그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는 한낱 간부에 불과했다.
함께 일한지 어느덧 5년이 훌쩍 넘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일절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키는 내 반응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언가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타케밋치가 있는 방."
시발. 이런 상스러운 단어를 그의 앞에서 감히 내뱉을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입을 꽉 물었다. 그리고 아까처럼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목을 죄어오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었다. 지겹도록 듣던 구두 소리도 오늘따라 무겁게 들려왔다. 내가 왜? 그 새끼를 왜 돌봐야하냐고. 입 밖에서 내뱉지 못 할 말을 속으로 삼키며 여러 번 되새겼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미쳐 돌아갈 것만 같아서. 싫다고 지랄발광해도 선택권은 이미 개나 줘버렸기에 아까 확인한 주소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빨리 만나고 해치워야지. 띵, 하는 도착을 알리는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마이키가 알려준 주소, 그러니까 시궁창이 감금당하는 방은 불순한 목적 치고는 꽤 호화스러웠다. 아파트 한 채 정도의 면적에 화장실, 주방 등 흔히 가정집에서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다른 점이라면 화장실을 제외하고는 벽에 아무것도 없다는 거랄까. 덕분에 고개만 돌려도 시궁창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밖에도 티비, 게임기, 디비디, 책 등. 여가 활동도 맘껏 할 수 있게 마련되어 있었다. 마이키가 말하기를, 시궁창이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면 외출을 제외하고는 다 들어주라고. 수령이 시궁창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특별한 점이 있다면 현관문 위쪽에 창문이 달려있다는 거다.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시궁창의 모든 행동을 지켜볼 수 있게끔 되어있는 장치였다. 시궁창의 첫인상은 단언컨대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조건이었다. 방에 들어가지 않으면 마주칠 일도 없고 얘기할 기회도 없을 테니. 그 쫑알거리는 입이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궁창은 꽤 눈치가 좋았다. 창문 너머로 지켜볼 때면 귀신같이 알아채서 인사를 건넸다. 키만큼이나 한참 작은 손으로 이리저리 흔들면 나는 중지를 들어 보였다. 내가 몸을 담근 이 음습한 세계와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주제에 욕하는 모습을 보고 꺄르륵 웃으며 오히려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세상에는 별난 놈이 많다는데 시궁창도 그중 한 명인 게 틀림없다. 물론 나도 포함이지만. 두려움은 커녕 이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 참으로 황당하게 느껴졌다. 근데 정말 신기한 건, 그때 이후로 시궁창이 묘하게 눈이 밟힌다는 것. 건방지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시궁창을 살펴보는 시간이 10초, 20초, 30초.... 정신을 차리고 나면 어느새 10분이 훌쩍 지나있었다. 시궁창이 미친놈이라서 특별히 하는 것도 없고 눈에 띌 정도의 몸부림을 쳐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퍼즐 맞추기, 누워서 게임하기. 심지어는 모니터가 반대 방향이라 시궁창이 어떤 게임을 하는지 소리를 듣고 유추해야 했다.
무의미한 시간이 계속해서 지나갔다. 시궁창은 방에서 자기 할 것을 하고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시궁창의 생활을 관찰하기가 어느새 내 일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두 눈을 떠 그대로 그 모습을 담았다. 손짓 하나부터 머리카락이 움직이는 그 세밀한 모습까지.
그 일상이 깨지는 건 얼마되지 않았다. 시궁창이 토끼같은 눈을 하고서 창문을 통해 내게 말을 건 것이 화근이었다.
앞서 받은 서류가 있었기에 시궁창에 대한 기본 정보는 대략 알고있었다. 나보다 한참 작은 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시궁창은 내게 딱 맞는 창문 위로 고개를 쑥 내밀었다. 저 태평한 얼굴 너머로 발꿈치를 세우느라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생각하자니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산즈군! 방에 들어오실래요?"
외출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들어주어라. 그게 수령이 내게 내세운 조건 중 하나였다.
이번에도 선택권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조용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아무런 저항 없이, 나는 내 의지로 직접 들어갔다.
-
그 날은 그 녀석과의 사이가 나름 가까워지고 방을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그 녀석이 뜬금없이 내민게 있었는데 바로 게임기였다. 일종의 격투기 게임인데 같이 하지 않겠냐며 내게 권유했다.
그 전까지 계속 거절당했던 주제에 어쩜 저렇게 얼굴에 철판을 잘 까는지. 그 날은 유독 시궁창의 푸른 눈이 반짝 거렸다. 그 볼품없는 유혹에 넘어가서 받아들인건지 아니면 여태 거절만 해 순간적으로 든 동정심에 받아들인건지. 눈 앞에 보이는 게임기를 무심하게 받아들였다. 시궁창의 손에 있을 때만해도 커보였던 게임기는 내 손에 들어오니 똑같은 게 맞나 싶을정도로 앙증맞게 보였다. 그 순간에 가슴 한구석이 살랑이며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시궁창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었으니.
"..."
"...괜찮아요. 산즈군 일처리 하나는 깔끔하잖아요!"
바로 내가 게임을 더럽게 못한다는 것. 초등학생 이후로 게임기를 만져본 적이 없어 어찌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하필 그 시궁창에 들킨다고? 스크랩을 할 이유는 충분했다.
게다가 위로한답시고 일처리를 잘한다는 건 뭐야. 오히려 불순한 의도가 있으면 모르겠지만 저 새하얗다 못해 머리까지 깔끔한 저 녀석이 내뱉은 말에는 오로지 진심 밖에 묻어있지 않았다. 그 부분이 나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범천의 2인자인 내가 이대로 물러선다고? 시발 그럴리가 없잖아. 안에서 그르릉 소리를 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한 번 더 해."
"근데 저 슬슬 졸린데... 다음에 하면,"
"하자고."
째릿. 꽤 살벌하게 노려보는데도 이제 제법 익숙해진건지 눈하나 깜짝안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시궁창이 무기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 한 판이에요. 알겠죠?"
"어."
시발 이번에는 꼭 이긴다.
-
"흐아암.... 산즈구운... 내일 철야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구나... 이제 그만해요."
"닥쳐."
무승 완패라는 굴욕적인 결과를 안게되었다. 몸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철야가 뭔데? 너는 나한테 발릴 준비나 해라. 승리를 향한 열정은 게임기를 부숴져라 쥐는 손으로 향했다.
시궁창은 피곤하다며 일찌감치 자리를 떴다. 불을 끈 캄캄한 방 안에서 커다란 티비 속에 비치는 빛에 의지하여 게임기를 두드리니 눈이 뻘개지고 꼴이 말도 아니었다. 감을 때마다 이물질이 느껴지는 것만큼 뻑뻑해진 눈을 가만히 두긴 커녕 오히려 부릅뜨며 게임에 집중하였다.
그러다가 잠에 깬 시궁창이 부시시한 모습으로 이불을 끌어온 채 잠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지금 새벽 3신데. 5시에 나간다면서요."
"넌 가서 잠이나 쳐 자."
"산즈군이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자요."
하암.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한 시궁창이 꼼지락 거렸다. 맨발과 바닥이 부딪히면서 찰진 소리가 들려왔다.
나름 혼자 하면서 스킬을 익혀 유하게 굴러갔던 손놀림이 그 녀석의 발소리가 들려오자 묘하게 삐거덕 거렸다. 저벅저벅. 그게 몇 번 정도 들렸을까. 게임이 클라이막스가 다다를 때쯤 소리가 우뚝 멈추었다.
뭐지? 호기심이 살짝쿵 고개를 내밀기도 전에 등 뒤로 따뜻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리고는 어깨를 시작으로 몸 전체적으로 폭신한 물체가 감싸왔다.
"이제 그만하고 자요... 네에?"
아직 잠에서 덜 깬건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시궁창이 말했다. 아니, 그 이유 말고도 하나가 더 있어보였다.
내 어깨나 팔 위로 올려진 건 분명 이불이 맞는데 등 정중앙에 위아래로 길게 뻗은 물체는 이불 치고는 제법 단단했다. 게다가 무게감도 있었다. 마치 사람이 기대고 있는 것처럼.
등 뒤에 옆으로 기댄 시궁창이 자신과 함께 나까지 끌어들여 이불을 덮은 것이었다. 단단한 내 등에 짓눌린 부드러운 뺨은 그 녀석의 발음을 어눌하게 만들었다. 등에서 내뿜는 체온과 감싼 이불의 따뜻함이 시궁창의 온 몸에 스며들어왔다. 이윽고 꾸준히 웅얼거리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아마도 시궁창이 내 등에 기대어 잠을 자는 모양이다.
리모컨을 들어 게임 소리를 줄이긴 했지만 게임기 버튼을 누르는 소리는 여전히 잘들렸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한참 작은 그 녀석의 숨소리가 더 크게 맴돌았다.
마치 시계 초침소리를 한 번 신경쓰면 계속 들리는 것처럼 그 녀석의 숨소리가 내게 그랬다. 색색 거리며 규칙적으로 오르락 내리락 움직이는 그 작은 체구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한 번 이긴 뒤로 WIN 밖에 보이지 않던 화면에는 어느새 LOSE라는 글자가 가득찼다. 눈에 그대로 담은 나는 기가 찬 소리를 냈다.
"시궁창이랑 있으면 지기만 하네."
이번의 패배는 아까와는 차원이 달랐다. 전에는 억울함과 분함에 휩싸여 연습을 해서라도 이겨야겠다는 승부욕이 들었다면 이번에는 그런 감정이 아예 들지 않았다. 오히려 게임기에 손을 당장이라도 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게임기를 쥔 손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빛이라고는 티비 밖에 없는 이 넓고 어두운 방에서 그 녀석은 굳이 다가와 내 등 뒤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 그 거슬리는 숨소리를 내면서.
게임을 하기 싫으면서 게임기를 놓지 않으려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확한 해답은 찾지 못했지만 시궁창과 연관이 있는 건 분명했다.
-
시궁창이 감금되어 있는 방은 꽤 고층에 위치했다. 한 쪽 벽면은 아예 창문으로만 되어있었는데 그걸 통해서 바깥 경치를 구경하는게 시궁창의 취미인 듯 했다. 평소에는 음악을 들으면서 창가 근처에 위치한 소파에 앉곤 하는데 오늘은 의자에 앉지도, 음악도 틀지 않았다.
"밖으로..."
시궁창이 조용한 말로 중얼거렸다. 살짝 거리가 있던 곳에서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고민했다. 밖으로 완전히 나가고 싶다는 건가? 아니면 잠깐 나가고 싶다는 소리인가? 그 녀석이 감금된지 어엿 두달정도 되었으니 그런 마음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그렇다고 내가 수령에게 그 녀석을 한 번 바깥에 내보내는게 좋지 않겠냐고 말하는 건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 나가면 더 귀찮아질게 뻔했으니 오히려 그 반대가 더욱 말이 되었다.
그랬을 터인데...
"하나가키를 밖에 내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물론 제가 동행할 겁니다."
"...의외네."
"뭐가 말입니까?"
"산즈 네가 그런 말 하는 거."
마이키의 눈이 반쯤 감겨져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는 듯한 그의 눈빛에 무의식적으로 몸이 굳혀졌다. 꼿꼿이 세운 목 너머로 침을 삼켰다.
마이키가 먼저 호출하지 않는 이상 급한 일이 아니면 이렇게 먼저, 그것도 갑작스레 방을 찾아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급한 일이라고 하면 적대 조직이 쳐들어왔다던가 거래에 꽤 큰 문제가 발생했다던가.
근데 그 일만큼 그 녀석을 바깥에 내보내는게 중요한 일인가?
'그럴리가 없잖아.'
어디에 단단히 홀린게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수령에게 그 녀석이 바라는 일을 내가 직접 말할 일이 없지 않겠는가. 번거롭게 말이야.
마이키는 타들어가는 검은 눈으로 내 몸 위아래를 쓱 훑었다. 마치 무엇이라도 확인한다는 듯이. 그의 밑에서 일을 한지 꽤 오랜시간이 지냈다. 그를 알게 된 시간은 더욱 길었다. 하지만 어딘가 신기하다는 것처럼,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바라보는 저 눈빛이 꽤 꺼림직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너에게 목 매달며 충실하게 임하는데도 도대체 뭐가 궁금한 거야.
이미 나는 그 대답에 대해 알고있었다. 그야 불현듯이 떠오른 인물이 단연코 한 명이었는데 모를리가. 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다른 해답을 찾았다. 지겹도록 느꼈던 그의 날카로운 촉을 무시하면서 까지. 내 인생의 왕인 그에게 이런 불순한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내가 변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증거였다. 자신이 경멸스럽고 오만하게 느껴졌지만 시궁창 때문에 바뀌어졌다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메슥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체내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뱉어 버릴게 분명하니.
마이키는 결정을 내렸는지 보고있던 서류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해."
생각보다 대답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그대로 방에서 나왔다. 최악의 경우에는 어디 하나 잘려나가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상황이 흘러가니. 안심이 들기 보다는 허무했다.
"...뭐 잘된 건가."
이 사실을 듣자마자 펄쩍 뛰는 시궁창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래 좋으면 좋은 거지.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시궁창은 바깥 세상을 몹시도 좋아했다. 넓은 방이라도 그 제한된 공간 속에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신기할 정도로. 깡충깡충 뛰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이 꼭 토끼 같았다. 물론 귀엽다는 소리는 아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동물을 싫어하니까. 그러니까 저 방방 뛰는 모습이 역겹다는 소리다. 그래. 내가 입꼬리를 올린 이유도 어이가 없어서 그런 거다. 단지 그거 뿐이다.
"산즈군!! 저희 이거 봐요! 이거!!!"
녀석은 10층은 훌쩍 넘어보이는 건물에 크게 달린 영화 포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항상 실내에서만 목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아무런 장애물 없이 널리 퍼진 그 녀석 목소리는 청량하게 들려왔다. 이슬만 삼킨 것 같이 옥구슬 같은 목소리를 내며 건방지게 내 팔을 질질 끌어당겼다.
"야 너 지금 뭐하냐?"
"얼른 가서 예매해야죠!"
이 녀석 초딩인가? 아니면 영화관 한 번도 안 가 봤어?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정확하게는 시비를 털고 싶었다. 저 녀석이 표정을 찌푸린다든가 속상해하는 모습이 은근 중독성 있었다. 그 원인이 나라면 더더욱.
평소라면 이미 신경을 툭 건들고도 남았겠지만 오늘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그냥, 저렇게 해맑게 웃는 것도 즐거워 하는 것도 처음보는 것 같아서. 오늘이 끝나면 당분간은 못 나올텐데. 그 갑갑한 방에서 유일하게 세상을 보여주는 넓게 펼쳐진 창문을 보며 지을 녀석의 표정을 생각하자니 답지않게 동정심이 들었다.
그래. 오늘 뿐이고. 그리고 저 표정도 꽤 봐줄만 하잖아. 광대를 방긋 올리고 헤실 웃어대는 녀석의 모습을 양 쪽 눈에 온전히 담고 생각했다.
이번만큼은 내 없는 배려까지 다 끌어모아 베풀어주겠다는 마음으로 그 녀석에게 어떤 영화를 보고싶냐며 선택권을 주었다. 그 못생긴 입술을 삐죽 내밀며 집중하는 모습이 퍽이라도 웃겼다. 커다란 스크린 위로 손가락을 올려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카메라 어플로 고스란히 담았다. 시작과 끝에 동영상 작동음이 들렸지만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내가 자신을 찍고있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건 그거대로 웃겼고 "이거요!!" 라며 환호하면서 가리킨게 겨우 예매율 1위짜리 영화라는 점이 웃겼다. 그럴 거면 도대체 왜 그렇게 고민한 거야? 이번만큼은 누가봐도 웃겠구나 싶어 애써 흘러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영화가 시작하기까지 20분 정도가 남았다. 뭐할까? 라는 눈빛을 보내니 당연히 팝콘 사야죠! 라고 맞대응을 해왔다. 딱히 그렇다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이미 뻗은 저 발걸음이며 무슨 맛있는 냄새라도 찾는 듯 벌렁거리는 코를 보면 누가봐도 눈치챌 수 있었다. 단순한 놈.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까딱이니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스낵 코너로 달려갔다. 그리고 사온 게 두가지 맛이 가득 들어간 라지 사이즈의 팝콘 하나와 음료 두 잔. 나는 짭쪼름한 오리지널의 팝콘을, 그 녀석은 설탕으로 절여진 카라멜 팝콘을 하나씩 집어 먹으며 입장 시간까지 기다렸다.
물론 영화, 스낵 모두 내 카드로 결제했다. 이 녀석은 웃기게도 처음 카드를 받았을 땐 염치 없이 어떻게 써요...! 라고 쩔쩔매더니 한 번 쓰고는 그 이후로 써도 되냐는 물음은 커녕 저 썼어요! 라는 당돌하게 통보를 보냈다. 역시나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거 가지고 불쾌하다든가 따지고 싶은 마음은 일절 없었기에 별 말 없이 넘어갔다.
나는 팝콘이 집지 않은 깨끗한 손을 그 녀석을 향해 까딱 움직였다.
"카드 내놔."
"아! 안돼요. 저 더 살 거 있단 말이에요!!"
"곧 영화 시작하는데 살 게 뭐가 있다는 거야."
"있어요! 아무튼 조금만 기다리세요. 저 10분이면 올 수 있어요."
"뭘 사길래 10분이나, ...누가 시궁창 아니랄까봐."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보였다. 건방진 새끼. 속으로 내뱉은 거친 말 치고는 그때의 표정은 딱히 어둡지는 않았다. 벽에 달린 전자 시계를 확인하니 영화까지 15분 정도 남아있었다. 어차피 처음 10분은 광고 하니까 괜찮겠지. 늦지 않기만을 바라며 휴대폰을 들었다.
그렇게 혼자 뻘짓을 한지 거의 10분이 지났다. 이제 슬슬 오겠지. 분이 숫자 35로 바뀌자마자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옆에 두었던 팝콘과 콜라를 들고 그 녀석이 나갔던 영화관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팝콘을 샀으니 영화 보면서 먹을 건 아닐테고. 도대체 뭘 사러 간 거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 곳만을 향해 바라보던 중 허리 쪽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툭.
"어머! 죄송합니다!!"
"아뇨."
30대 초중반정도 보이는 여성이 식겁하며 내게 달려왔다. 보아하니 장난치다가 의도치않게 나와 부딪힌 이 여자아이의 부모인 듯 했다. 어린주제에 얼마나 힘이 센 건지. 들고있던 팝콘이 통 위로 몇 개 튀어올라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콜라를 흘리지 않았다.
여성은 달려오고는 있지만 꽤 거리가 있어 이 쪽까지 오는데 약간 시간이 걸릴 듯 했다. 부딪힌 건 이제 초등학교 입학한 것처럼 보이는 애새끼지만 나보다 한참 여리니까 일단 상태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아무 이상 없겠지만.
무신경하게 뒤로 휙 돌아 나름의 배려로 아이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래봤자 내 시선이 10cm 더 위에 위치했다. 눈동자만 돌려 아이를 확인하니 부딪힌 부분의 옷에 살짝 주름이 진 것 말고는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네. 괜히 시끄러워졌다가는 골치 아프니까.
"괜찮아?"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아이를 훑으며 물어봤다. 목소리가 작은 편이 아니라 충분히 들렸을텐데 앞에서 대답 소리는 커녕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뭐야 안들렸나? 혹시라도 어디 아픈 건가 싶어 바로 그 아이의 눈을 바라봤다.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이내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 내가 뭘 했다고? 손바닥만한 키 맞춰주려고 허리도 숙이고 목소리까지 신경썼더니 돌아오는 거라고는 눈물을 글썽이는 커다란 두 눈이었다. 여자아이는 내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고는 시선을 아주 살짝 아래로 내렸다. 무서운 건지 표정이 완전히 굳어있었다.
그렇게 두려움과 황당함을 서로 주고받던 중 여성의 발걸음 소리가 더욱 가까이 들려왔다. 여자아이 역시 그걸 들었는지 바로 앞에서 물었던 내 질문에는 대답도 안하고 그보다 멀리 떨어진 엄마에게 냉큼 달려가 와락 안겼다.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나? 살짝 뚱한 표정으로 지은채 더이상 굽힐 이유가 없는 허리를 보란듯이 바짝 세웠다.
여자아이는 엄마의 어깨 위로 얼굴을 마구 비비더니 검지로 제 입꼬리를 가리켰다. 엄마는 그런 제 딸을 한 번 나를 한 번 보더니 단숨에 얼굴을 굳혔다. 그제서야 나는 왜 그렇게 여자애가 자신을 보고 겁에 질려하는지 알아챘다.
아 개같네. 그 여자아이가 했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양쪽에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상처 난 입꼬리를 매만졌다. 엄마는 딸이 제 품에 안겨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방금 얘기 때문에 그런 건지 그 거침없던 발걸음은 어디가고 눈을 또르륵 굴리며 내 눈치를 봤다. 소심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꽤나 역겹게 느껴졌다. 그딴 식으로 올 거면 그냥 무시를 하던가.
여성은 약 5보 정도 떨어진 거리로 다가왔다. 아이는 나와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듯 여성에게 꼭 매달려 고개를 들 생각을 못했다. 이래서 내가 순수한 새끼들이 싫은 거야. 사과를 할 생각인지 아님 없는 건지 내 쪽으로 얼굴이 향하긴 한데 시선은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마음 깊숙히 끈적이는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간질거리고 지금 당장 손톱을 바짝 세워 한 군데도 빠짐없이 거칠게 긁고싶었다. 피가 나더라고 이 불쾌하기 짝이없는 느낌을 당장이라도 없애고 싶었다.
여성이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는 내 얼굴이 더욱 어두워져갔다. 나는 두 입술을 앙하고 물었다. 은연 중에 양쪽 상처를 조금이라도 숨기고 싶어서 한 행동이었다.
그때 갑자기 산소가 급격하게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코를 시작하여 턱까지 커다란 부드러운 무언가가 감싸왔다. 그리고는 귀에 굵은 선이 걸려왔다. ......마스크? 귀 끝에 살짝 스친 손길을 생각하며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 곳에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보이는 그 녀석이 보였다. 정확하게는 그 웃음을 내게 아닌 저 모녀에게 향해있었다.
그 녀석은 내가 의식해서 낸 목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부드러움으로 여성에게 물었다.
"저 혹시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 그게 제 딸이 장난을 치다가 그만 저 분이랑 부딪혀서요."
그 녀석은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봤다. 파랗게 빛나는 그 두 눈은 괜찮냐고 걱정하는 의미가 투명하게 보였다. 당연히 괜찮지. 그럼 저 꼬마애랑 부딪혔는데 내가 날라갔을까봐? 입 주변을 덮은 마스크 감촉을 느끼며 말 대신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은근히 눈치가 빨랐던 그 녀석은 단번에 알아듣고 다시 그들을 보며 괜찮다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러면서 내 등을 토닥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무슨 어린 앤 줄 아냐고. 저 녀석이 오면서 속으로 이런저런 불만이 많이 생겨났다. 그래도 아까처럼 그 거지같은 가려움은 말끔히 사라져 지금이 훨씬 나았다.
"저 정말로 죄송합니다. 너도 얼른 사과해야지!"
"잘못 했어요...."
"...괜찮습니다."
둘은 내가 마스크를 쓴 뒤에야 사과를 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쩐지 상처가 가려져서 겨우 받아낸 기분이라 썩 후련하진 않았다.
영화관으로 들어가 지정석으로 가 앉았다.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보험 회사 광고가 나오던 중 그 녀석은 목소리를 낮춰 아까 무슨 일이 있었냐며 설명을 요구했다. 그 여자애가 달려와서 내게 부딪힌 것부터 내 상처를 보고 겁 먹은 것 같다는 것까지 모두 말했다. 굳이 이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어쩐지 거부감 없이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산즈군은 모르죠?"
"뭐를."
"그거 상처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표정이 원인이에요."
"뭐?"
"산즈군 무표정일 때 얼마나 무서운 지 알아요? 그러니까 도망가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녀석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거 봤는데?"
"산즈군 평소에 입꼬리 아래로 좀 내려가 있어요."
"그거 때문에 그렇게 무서워한다고?"
"거울 보여드려요?"
"이 새끼가."
"그냥 상처 뿐이잖아요~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아무도 이상하게 안 봐요."
"누가 그딴 걸 신경 써?"
"산즈군 밖에 나오니까 계속 상처 부분 만지길래. 아님 말구요!"
손가락이 순간 움찔했다. 내가 상처를 만졌다고? ...그럴리가. 그 녀석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 상처가 생긴지도 몇 년이나 지났고 도만 때 잠깐 마스크를 낀 이유도 권유 때문이지 결코 내 의지가 아니었다. 보여주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야 단순히 흉터일 뿐이고. 애초에 직업상 상처가 없는 것도 이상하지 않는가.
영화 시작 전 바쁘게 움직이는 광고를 구경하는 그 녀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넋 놓고 바라봤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이 새끼, 그럼 나간 이유도 마스크 때문인 거야? 건방져.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건방짐이다. 관심을 꺼둔 흉터를 왜 꾸역꾸역 꺼내는 거지? 네가 나야? 왜 나한테 신경을 못 써서 안달이야.
정말,
"아니면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너무 잘생겨서 놀란 거 아닐까요?!"
건방지다.
"지랄한다."
"히히~"
겨우 세상 밖에 나온 꼬마애가 뭐든지 다 안다는 듯이 허세를 부리는 모습을 보면 대다수의 어른들은 그에 미소를 짓곤 한다. 아마 이것도 그런 이유겠지.
"미남 옆에서 영화 보는 거 처음이라 두근 거리네요!"
"닥치고 영화나 봐."
"치...."
그래야만 했다.
"...풉."
-
"너 괜찮아?"
오늘만해도 벌써 3번째다. 언제부터 나한테 관심이 많았다고? 전혀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지만 보여주기 식의 말이라도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소파에 기댄 채 중지를 들었다.
욕 하는 거 보니까 괜찮은가 보네. 대수롭지 않게 여긴 코코노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작업 중이던 노트북을 덮었다. 밤에 작업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나갈 채비를 하는 모양이다.
이제야 좀 혼자 있겠네. 주머니에 있던 작은 틴케이스를 꺼냈다. 탁, 소리를 내며 열린 케이스 안에는 봉지에 각각 담긴 알약이 있었다. 거침없는 손길로 봉지를 열어 그대로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3분. 효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너 무슨 일 있었지?"
가방을 챙겨 들은 코코노이가 무신경한 말투로 물었다.
아직 1분도 안됐는데 벌써 약빨이 돈 건가? 엄청 나른하네. 온 몸으로 감싸오는 이 황홀한 기분을 느끼고 싶어 그의 질문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코코노이는 그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하나가키 타케미치, 그 녀석이랑 바깥에 나갔다 온 뒤로 이상해졌어."
"....."
"소문 다 났다고. 아냐?"
눈치 빠른 녀석이라 내가 대답 따윈 하지 않을 거라 알고있을 거다. 아무말 없이 그저 입을 벌리고 있으니 코코노이는 더이상 말을 잇지않고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자니 몸에 더욱 힘이 빠졌다.
이상해졌다라. 그 녀석 앞에서는 아무말 하지 않았지만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코코노이가 말한 것처럼 내가 이상해진 시점도 정확히 그 녀석과 나갔다 온 날이다. 그래. 하나가키 타케미치 그 녀석 말이야.
그 녀석이 있는 방에 한 번 발을 들이니 나도 모르게 매일같이 들어갔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발걸음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무도 없던 집에서 갑자기 반겨주는 사람이 생겨서 그런건지. 한 번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게임이나 티비 같은 부질없는 활동을 하고싶어서 그런건지. 사람들에게는 감시라는 명분을 대고 일이 끝나면 항상 그 곳으로 갔다. 그러면서 그 녀석과 자연스레 친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옆에서 항상 같이 일하는 코코노이나 하이타니 형제, 카쿠쵸보다 훨씬 편했다. 이거 역시 이유는 모르겠다. 사람을 죽이고 묻는 피폐한 상황이 아니라 가정적이면서 포근한 분위기에서 만나서 그런건가. 어느새인가 나는 그 녀석에게 기대고 있었고 그 녀석은 무슨 생각인지 아무런 불평없이 나를 받아주었다.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무슨 감정이나 생각이 들어도 내가 무시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같이 외출을 한 이후로 그 푸른 눈이 꼴보기 싫어져 일정하게 굴러가던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처음에는 바빠서. 두번째도. 세번째는 몸이 좋지 않아서. 네번째는 뭐였더라. 그냥 다 구차한 변명 뿐이었던지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남의 인생에 뭐가 그리 관심이 많은지. 내가 방으로 가지 않는 두번째 날에 소문이 쫙 퍼졌다. 나와 그 녀석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싸웠다부터 잠자리까지 가졌다는 별 이상한 얘기들이 뒹굴었지만 나는 굳이 가서 정정하지 않았다. 내가 나타나면 숨기 급급한 찌질한 새끼들에게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우스웠고 무엇보다 그 녀석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시발 좋아지는 것 같더니."
최근 일주일 동안, 그러니까 그 녀석과 나갔다 온 이후로 나는 매일 같이 다른 약을 털어 넣었다. 평소에는 잘만 호르몬을 건들던 녀석들이 내성이 생겨서 그런지 효과가 전혀 미미했다. 코코노이랑 있을 때만 해도 붕 뜨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혼자 남겨지고 생각이 많아지면서 또 팍 식어갔다. 약들이 하나같이 다 제 역할을 못했다. 그 녀석이랑 있을 때보다 잠잠하면 어쩌냐고. 그것 때문에 먹는 건데 의미가 없잖아.
손에 쥐었던 틴케이스를 바닥으로 거칠게 던졌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린 케이스로 알약이 튀어나와 부드러운 매트 위로 흩어졌다. 꽤나 아끼는 제품들이라 케이스까지 넣으며 보관해뒀는데 이젠 쓸모가 없어졌으니 더욱 화가 치솟았다.
왜 효과가 없냐고. 대체 왜. 얌전히 뻗은 앞머리를 움켜쥐었다. 그 녀석을 생각만해도 모든 위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에 가서 게워내도 전혀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약을 먹었는데 효과도 전혀 없고. 심장 부근이 묘하게 저릿하고 온몸이 무거우면서 가벼웠다. 길게 쭉 뻗은 입꼬리가 아려왔다.
혼자만 있으면 약 효과가 안 드는 이유, 분명 그 녀석 때문이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그래. 그 녀석이 자꾸 떠올라서 그러는 거잖아.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는데.
별거 없는 놈들이 떠드는 소문은 어느정도 맞았다. 그 녀석과 내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긴했다. 그 원인이 나 혼자라는게 문제지만.
눈치없게 멀쩡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선반에 진열된 도수 높은 온갖가지 술들이 눈에 들어왔다.
"......취하자. 술이라도 취하겠지."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술을 향해 걸어갔다. 떨어져있던 약들이 구두에 짓눌리면서 안에 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더럽게 비싸긴 했지만 상관 없었다. 이건 내가 초래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 녀석은 내가 단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빌어먹게 계속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니. 약이 안된다면 다른 수를 찾아서 지워버리면 그만이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도수가 가장 높은 녀석으로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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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술 대신 마약을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환각을 일으키지 술처럼 본능을 일깨우지 않으니까. 술은 몸과 함께 마음을 나약하게 만들어서는 그대로 본심을 내뱉게 만들었다. 그게 내 의지든 아니든.
그 녀석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데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그 사실을 간과했다. 내 진심과 함께.
"하...으..... 씨."
걸어가는 복도가 심하게 울렁거렸다. 그 울렁임 속에 자꾸만 부딪혀 쿵 소리와 함께 발을 몇 번이고 헛디뎠다. 이 익숙한 길. 부정할래야 할 수 없을정도로 지겹도록 다녀간 이 길. 그 녀석이 있는 방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제정신이었다면 이미 다른 길로 갔겠지만 술에 심취해진 지금은 그 무엇도 이 들끓어오는 본능을 막을 수 없었다. 이로써 나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녀석이 자꾸만 떠올리고 신경이 쓰였으며 약을 먹는데도 그 녀석과 함께 있을 때보다 즐기지 못한 이유를.
알코올 냄새를 진득하게 풍기면서 그 녀석에게 가는 이유. 나는 하나가키 타케미치를 좋아한다.
아까 코코노이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 자식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내 마음을 눈치챈 듯 했다. 타인들도 다 아는데 내가 모를리가 있나. 이를 악 물고 무시했더니 막상 인정하게 된 순간은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설마 술을 마시고 인정할 줄이야. 하지만 이보다 더 정확하고 알기 쉬운 건 없다.
시야가 미친듯이 흔들리고 그에 몸도 넘어질 지경으로 아슬아슬한데 그저 그 녀석 하나 보겠다고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손으로 몇 번이나 짚고 자꾸만 풀리는 다리를 몇 번이나 억지로 힘을 주고.
타케미치를 지켜본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그것도 단 둘이 한 방에 있으면서. 타케미치는 틱틱거리는 내게 항상 인사를 했고 변함없는 귀여운 미소를 보여줬으며 예쁜 말로 내 귀에 속삭였다.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싫어하겠어. 그저 문제는 수령의 것인데 감히 내가 넘본다는 것이다. 그게 너무 컸다. 내게 수령은 절대적인 존재였으며 결코 거스를 수 없는 그런 손에 닿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의 것을 건들인다? 그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타케미치를 계속 찾고 끝내 인정하게 되었다는 건, 아마도 그만큼. 그 이상으로 좋아하는 거겠지.
"하아... 타케미, 치..."
마음을 인정하니 타케미치의 이름을 부르는 건 꽤 쉬운 일이었다. 술의 힘을 빌려서 더 그런 거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바라는 건 단 하나. 나보다 한참 작은 그 몸을 으스러질 정도로 힘껏 껴 안는 것. 단 한 번의 포옹으로 그 녀석의 체온, 체취, 촉감, 머리카락 하나까지 전부 다 머릿속으로 집어넣을 거다. 그리울 때마다, 보고싶을 때 마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을 때마다 나는 그 기억을 꺼내며 느낄 것이다. 이미 좋아한다고 인정해버렸는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냐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녀석에게로 가는 이유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몸으로 그 녀석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그러니까... 안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다와갔다. 이 모퉁이만 돌면 계속 아른거렸던 타케미치가 보인다. 저절로 떠올려지는 환상에 숨이 묘하게 떨려왔다. 술 때문에 아까부터 떨리긴 했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한 번 닿기 시작하면 손을 놓을 줄 모른다고. 약보다 독한게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 약도 못 끊는 내가 과연 조절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돌아갈 생각은 추후에도 없다.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넘는다면.
"...하아..."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술에 취한다고 결코 사람의 심장이 이렇게 뛸 수 없다. 이 원인의 제공자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더욱 거세게 바닥을 걷어찼다.
두근 두근. 대리석 위로 구두 굽이 닿는데도 심장 소리만 들려왔다. 모퉁이를 돌아 습관처럼 문에 달려있는 작은 창문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이런 불건전한 감정을 품는 동안 타케미치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내심 궁금했다. 평소처럼 게임을 하고 있으려나? 그것도 아니면 내게 줄 쿠키를 굽고 있을 지도. 타케미치는 나한테 무언가를 주는 걸 엄청 좋아하니까. 매마른 입술 위로 혀를 축였다. 살짝 힘이 들어간 눈으로 하나가키의 방을 훑었다.
열기 위해 손잡이로 움직였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현관문 앞에 서있던 발은 손을 대신해 빠르게 움직였다. 모퉁이 바로 옆에 있는 하나가키의 문을 지나쳐 딸랑 창문 하나 있는 복도의 끝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마치 나는 이 방에 볼 일이 없다는 것처럼 발에는 속도가 붙었다.
심장 소리는 멈춘 듯 들리지 않았고 다급한 구두소리만 귀에 그대로 꽂혔다. 본래 도착지와는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있던 창문에 도착했다. 풀려있던 눈이 뚜렷하게 돌아왔다.
당연히 혼자 있을 하나가키의 방에는 은발의 남자가 있었다. 누가봐도 마이키였다. 내게 타케미치를 맡긴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어둠을 뒤덮힌 바깥 풍경으로 무언가를 찾을 기세로 동공이 심하게 떨렸다.
그 방 주인인 타케미치도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의 앞에 마주보고 있는 마이키 때문에. 마이키에게 가려져 타케미치라고 알려주는 검은 곱슬 머리와 그 촌스러운 옷의 단서만 확인했다.
마이키는 타케미피와 함께 침대에 앉아있었다. 내 품으로 가득 넣을 그 몸 위로 손을 올리고 있었다. 술이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나에게 방금 마신 술은 스스로를 취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심지어는 내 마음까지 토하게 만들었는데. 하지만 그 광경을 보고 단숨에 술에서 깨어났다.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은발에게서 뻗어진 손의 위치를 보고 달아올랐던 몸이 훅 식었다.
마이키가 타케미치를 연정을 품은 내 속셈을 알리가 없다. 그럼 의도치 않고 뭉개버린 것인가. 이게 더 처참하게 느껴졌다. 타케미치가 너와 있을 수 있었던 건 타케미치가 자신을 찾았고 자신이 감시하라고 시켜서 그런거라고. 모든 이유가 마이키가 만들어 낸 결과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잠시라도 흔히 있는 로맨스의 남자주인공이라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서브로 떨어졌다. 자기만 그만 두면 모든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그 미련한 서브처럼.
몸을 벽에 기댄채 그대로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오늘따라 어두웠다. 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 마음도 그러했다.
"........그래. 이게 내 위치지."
아직 양복 주머니 안에 남은 약을 찾을 생각도 못하고 하염없이 칠흑같은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초승달을 바라봤다.
-
"짐은 이게 끝입니까?"
"네. 감사합니다!"
타인의 짐이 가득 든 상자를 품에 안은 검은 양복의 남성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나는 그에 맞대어 허리를 거의 90도로 숙였다. 마이키군이 시켰으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지만 내가 할 일을 타인이 해주는 것만큼 양심에 찔리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치고는 아무것도 손에 대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마지막으로 확인해달라고, 자신은 먼저 가보겠다며 남성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다시 한 번 그에게 고맙다고 소리쳤다.
며칠 전, 마이키군이 뜬금없이 내 방으로 왔다. 당연히 산즈군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크서클이 한참 내려온 그의 얼굴을 보고 적잖게 놀라했다. 잠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누워있었서 서둘러 일어나려 했지만 그 틈에 재빨리 오는 마이키군 때문에 어정쩡한 자세로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나한테 하는 말이,
"방 합칠래?"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사람. 몇 달만에 마주쳐서 한 말 치고는 너무나도 적극적이라 황당했다. 아무말 못하고 두 눈을 꿈뻑였다.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마이키군은 며칠 뒤에 사람 불러서 정리할 거니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아니 내가 그런 말을 원한 게 아닌데... 무작정 방을 합치자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보다 더 신경쓰이는 게 있었는데.
내 어깨 위로 올린 마이키군의 손을 붙잡아 눈을 빛내며 물었다.
"산즈군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으아... 나 그때 그거 왜 물었지!!!"
그때 그 상황을 떠올리자니 순간 머리 끝까지 수치심이 훅 몰려왔다. 방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후 간질거리는 몸을 크게 한 번 발버둥 쳤다. 갑자기 왜 그랬지!! 마이키군도 엄청 놀란 눈치였고..!! 선명하게 떠오르는 마이키군의 벙찐 얼굴에 더욱 미칠 노릇이었다. 남성의 말대로 방을 확인하긴 커녕 몇 분동안은 방 안을 활보하며 온갖 미친짓은 다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문득 주변의 서늘함을 느끼고 얼굴을 가린 손을 저항없이 내렸다.
"...나는 이렇게 신경쓰는데 산즈군은 나타나지도 않고."
외출한 이후로 산즈군이 내 방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마이키군이 왔다 간 사실도 알텐데 정작 자신을 계속 봐주었던 산즈군은 오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마이키군과 방을 합치면 전만큼 자주 못 볼텐데. 생각을 마치니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평소에도 자신을 향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니 그러려니 하며 애써 무시했다. 생각만큼 마음이 따라와주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
이제는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보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야했다. 윗층에서 마이키군이 기다리고 있을게 분명했다. 나는 그 기다림을 무시하고 추억에 매달릴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 방에 머무르며 산즈군과 함께 있는게 목적이 아니고 마이키군을 만나기 위해서 온 거니까.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목적이 여전히 유효한가, 라고.
바스락. 그때 문 쪽에서 봉지가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서둘러 돌렸다. 설마,
"짐 정리 다 했네."
"어.....!!!"
"오랜만이다? 시궁창."
"산즈군!!!!"
어딜 갔다가 이제 온 거예요!! 그토록 기다렸던 인물이 막상 눈 앞에 보이니 입을 제대로 열 수가 없었다. 꿀먹은 벙어리가 된 것 마냥 아, 아 하는 바보같은 소리만 내뱉었다. 산즈군이 안보이는 그 며칠동안 그에게 얼마나 잔소리를 할 것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생각해두었는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얼굴을 보자마자 완전히 잊어버렸다.
반가움에 몸을 냉큼 돌려 다가갔다. 근데 그에게서 무언가 이질감이 들었다. 그 원인은 다름아닌 산즈군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두 개의 꽃다발이었다. 산즈군에 향했던 시선이 단숨에 꽃으로 박혔다. 꽃다발은 둘 다 금어초가 담겨있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는 분홍색과 흰색이 어울려 애기 금어초가 잔뜩 들어있었고 다른 하나는 흰색의 금어초가 몇 송이 밖에 없었다.
뭐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니 적게 든 꽃다발을 제 뒤로 숨긴 산즈군이었다. 그리고는 그 큰 꽃다발을 내게 받으라는 듯이 내밀었다.
"자."
"응? 이게 뭐예요??"
"꽃. 받아."
"갑자기 웬 꽃을, 우왁!"
내 말이 거슬렸는지 얘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냅다 꽃다발을 던졌다. 가까스레 받은 꽃다발에는 은은하게 꽃향기가 풍겨졌다. 향기와 함께 산뜻해진 기분에 신이나 입꼬리를 활짝 올렸다. 나 주려고 사온 거지? 이거?? 간질거리는 심장은 나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아! 그나저나 왜 제 방에 안왔어요! 저 못나가는 거 알면서..."
"상관 없잖아."
"상관 있어요! 바보! 멍청이!"
"누가 바보라는 거야, 시궁창 주제에."
흐물한 웃음을 지어보인 산즈군은 어쩐지 후련해 보였다. 거친 말 치고는 달달한 표정이라 가슴이 떨려왔다. 손에 살짝 땀이 차기 시작해 그가 보기 전 바지에 서둘러 닦아냈다.
산즈군은 오늘따라 내 얼굴을 고집스레 바라봤다.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을 기세로 보는 그 깊은 눈에 귀가 살짝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내게 관심을 대놓고 보인 것도 처음이고 내가 생각한 게 맞다면 더욱 피하기 싫었다. 눈을 크게 뜨며 나도 산즈군에게 관심있다는 의미로 뚫어지게 바라봤다.
살짝 벌려진 부드러운 입술이 살며시 움직였다.
"진짜 좋아하네."
"......네, 네?!! 아니 전...!! 산즈군을 좋아하긴, 어... 하는데.... 으음...... 티 많이 나나요?"
"풉."
"으음??"
"잠깐이라도 망설였던 내가 바보였지."
의미를 모를 말은 한 산즈군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안그래도 가까웠던 거리가 이젠 코앞으로 다가오자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코 끝으로 퍼지는 달콤한 냄새에 무의식적으로 침을 한 번 삼켰다. 두근두근. 심장 소리 때문에 주변이 시끄럽게 느껴졌다.
툭. 혼잡한 머릿속에 방금 전의 소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앞에서 남은 꽃다발을 바닥에 떨어뜨린 소리를 듣고 그제서야 정신을 번뜩 차렸다. 방금까지 열려있었던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음? 문이 왜...
그때 위에서 평소보다 한껏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케미치."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준 산즈군은 입 안에 무언가를 머금고 있었다.
"입 벌려."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 방에 하나가키 타케미치가 있는 대신 이 꽃이 있었습니다."
마이키는 제 앞에 보이는 흰색의 금어초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금어초는 색깔도 다양하고 피었을 때 그 누구와도 뒤쳐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졌지만 시들면 신기하게도 해골의 모형을 가지고 있다. 그에 따라오는 꽃말이 욕망과 오만.
칠흑 같은 눈이 느릿하게 감겨졌다.
"게다가 산즈씨도 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금어초를 감싼 포장지에는 분홍색의 애기 금어초 잎 하나가 붙어있었다. 또다른 사람에게 꽃다발을 줬나보네. 마이키는 생각했다. 애기 금어초의 꽃말은.
"내 마음을 알아달라, 라..."
"예?"
"아니. 혼잣말이야."
"저...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마이키는 제 책상을 검지로 툭툭 두어번 두드렸다. 그리고 이내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잡아와."
